#09 “공백기에도 커리어를 잇는 활동을 해야 자연스럽게 다시 일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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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주 소중한글 서비스 기획자
김혜주는 배움이 느린 아이들을 위한 한글 교육 앱 '소중한글'을 만드는 H2K에서 기획자로 일한다. 다양한 카테고리의 앱과 웹을 두루 만들었던 경험을 살리면서 착한 서비스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어, 소셜 미션을 가진 스타트업에 합류했다. 모든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이 되면 그 안에서 내 아이도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서비스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혜주님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2019년 5월부터 배움이 느린 아이들을 위한 한글교육 앱 '소중한글'을 만드는 H2K에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어요. 서비스의 방향성에 맞게 주요 요소를 도출하고 문제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일, 사용자를 위한 좋은 경험을 설계하고 기능을 개선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상황에 따른 이슈들을 컨트롤하고 디자인과 개발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있죠. 서비스기획이라는 일의 본질은 모든 구성원들이 같은 방향을 볼 수 있도록 가이드하며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소중한글 이전에도 서비스 기획을 하셨나요?
커리어의 시작은 ‘벅스뮤직’ 이었어요. 이후 게임 포털, 복지 플랫폼, 여행 서비스 등 다양한 회사에서 웹 서비스 중심으로 기획 업무를 해왔어요. 아이폰을 위시한 스마트폰이 널리 쓰인게 2010년 무렵인데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앱 서비스를 기획해왔죠. 비교적 이직을 많이 한 편인데 이직을 결정할 때 저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곳인가?' 예요. 만일 지금의 회사에서 그 부분이 충족되지 않으면 미련없이 그만뒀던 것 같아요.
그럼 혜주님은 육아로 인한 경력 공백은 없으셨군요.
사실 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이후에도 '퇴사'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살았어요. 육아휴직이 끝난 이후 친정 어머니가 지방에서 올라오셔서 2년 동안 육아를 도와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죠. 그런데 제 딸이 예민한 편이라 워킹맘으로 일하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언제부턴가 '내가 이제는 주양육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 자연스럽게 퇴사를 하게 되었죠.
마지막으로 일했던 회사는 한화S&C의 드림플러스였는데, 정말 일이 재미있었거든요. 팀에 기획자 수가 적어서 모든 플랫폼과 디바이스를 컨트롤하는게 쉽지는 않았지만 구성원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워낙 잘 되어서 정말 즐겁게 일했어요. 뭐랄까, 대기업이지만 벤처처럼 일하는 분위기였달까요?
그런 환경에서 즐겁게 일하다 퇴사하면 허전함이 꽤 컸을텐데, 경력 공백기에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어요?
성격상 사교적이거나 활발한 활동을 하기보다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어요. 하지만 동시에 회사를 그만뒀다고 제가 커리어를 완전히 내려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2017년 1월에 퇴사하고 제가 직접 기획한 육아일기 앱을 론칭시키기도 했고, 직전 회사의 프로젝트에 프리랜서로도 참여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계속 뭔가 저의 일을 이어가는 활동을 해선지 재취업을 고민할 때 주저하는 것도 거의 없었고,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고 계세요?
아이가 9시에 유치원에 등원했다가 4시에 돌아와서, 아이가 없는 시간에 집중해서 일해요.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는 밤 11시가 될 때까지 제 시간이 거의 없어요. 100퍼센트 아이에게 시간을 써야 해요. 밤 11시까지 강도 높은 야근을 한 다음,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나머지 업무를 하는 엄청난 스케줄이랄까요?
본격적으로 일을 다시 시작했던 초반에는 예전에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때처럼 스케줄을 짜는 바람에 너무 힘들었어요. 목표한 일은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그날 그날 목표한대로 일을 못해내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남편과 아이에게 전가되었고요. 이 부분에 대해 혼자 고민하다가 요즘은 조금 느슨하게 스케줄을 짜요. '내가 정말 이 일정대로 일할 수 있을까?' 생각을 먼저 하고 최대한 해보다 안되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보충하는 식으로 일정 관리를 하죠. 심적으로도 훨씬 여유가 생겼고, 대표님이 저의 상황을 많이 이해해주셔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기획자라서 일정을 못맞추는 팀원이 있으면 일정과 계획과 맞춰갈 수 있게 푸쉬하는 역할을 주로 했는데 저희 대표님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200%를 투입하며 고생하는 걸 아니까 많이 이해해주시는 게 느껴져요. 그런 고마운 마음을 알기에 저도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고요.
팀이 있는 대전에서 혼자 떨어져 서울에서 일하다 보면 외롭지는 않으세요?
외로움보다는 리모트 워크를 하다보면 구성원간의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에게 맞추는 과정이 초기에 필요한 것 같아요. H2K에 입사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어느 날, '내가 일하고 있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팀은 다 대전에서 일하는데 혼자 서울에서 일하니까요. 일단, '위키' 라는 툴을 같이 써보자고 제안해서 제가 생각하는 소중한글의 방향과 모양을 생각날 때마다 위키에 기록했죠, 어느 정도 완성이 되면 구성원들과 함께 보며 다듬고 또 디벨롭 하려고요.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 중간에, 잠깐 짬이 나는 틈새마다,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 불현듯, 정말 생각이 날 때마다 기록하곤 했는데 제가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메일로 알림이 전송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대표님이 얼마 지나서 "도대체 새벽에 왜 일을 하시는 거에요!" 하며 웃으셨죠. 제가 저의 일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런 건 절대 아니고, 매 건마다 그렇게 알림이 가는지는 몰랐어요(정말이에요!).
이런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쌓여 서로에 대한 신뢰를 만드는 것 같아요.
제가 몇시에 출근을 하고 몇시에 퇴근을 한다고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제가 해놓은 일들을 가만히 보면 '아- 이 사람은 하루 6시간 근무를 약속하고 입사했지만 더 많은 시간동안 우리 서비스에 대해 고민하고 있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니까요.
그 알림 사건 이후로 망설이는 순간도 늘었죠. 저는 일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명시된 근로시간 외에도 일 생각을 정말 많이 하거든요, 잊어버리기 전에 바로바로 슬랙에 공유하고 싶은데 금요일 저녁 시간엔 고민이 되기도 해요. 저만 이렇게 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이렇게 일을 좋아하는 엄마가 일을 계속 하려면 어떤 환경이나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할까요?
일단, 아이의 성격이 많이 중요한 것 같아요, 아주 중요해요. 사실 저희 아이는 많이 예민한 편이거든요. 이런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하려면 탄력적인 근무 환경이 필수 요소인데 이런 환경을 용인하는 회사가 아직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힘든 부분이니까요. 저는 아이를 9시부터 6시까지 맡길 수 있는 사회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유연하고 탄력적인 근무 환경이 자리잡는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일하는 엄마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스스로가 정한 업무 시간에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거예요. 사실 육아를 하면서 동시에 일을 한다는 건, 일하는 사람으로서는 퍼포먼스에 대한 불안과 매일 싸우고, 엄마로서는 아이에 대한 걱정과 매일 싸우는 이중 노동이거든요.
일하는 엄마라면 누구나 느끼는 이 불안을 잘 다스리려면 결국 일할 때는 일에만 집중하고, 아이와 있을 때는 아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해요.
혜주님도 불안과 싸우고 계시군요. 이 싸움이 언젠가 끝난다면, 한 5년 후쯤에 혜주님은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 것 같으세요?
5년 후라, 너무 먼 미래같긴 하지만 5년 후에도 H2K에서 일하고 싶어요. 저는 우리 회사의 서비스가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서비스 기획자라서 그런게 아니라, 모든 교육의 시작은 한글이에요. 이렇게 중요한 한글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H2K는 이런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소중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미션을 가진 회사이고,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한 것 같아요. 정말 멋진 서비스로, 팀으로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현재로선 가장 커요.
개인적인 목표는 성격상 기록이나 정리를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여러 포인트를 잘 기록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 싶어요. 이를테면, 제가 온라인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오프라인의 경험을 더 쌓아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잘 조화된 서비스를 만들고 싶어요.
소중한글을 만들면서 혹시라도 여유가 생긴다면 이러저러한 사이드 프로젝트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다시 일을 시작하길 고민하거나 커리어 전환을 꿈꾸는 엄마들에게 한 마디 할 수 있다면요?
한 때 정말 일도 잘하고 훌륭했던 동료들이 휴직기를 보내는 동안 '내가 이 사회에 정말 필요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자존감이 낮아지기도 하고, 지적 대화에 대한 갈증을 엄청 느끼는 걸 자주 보게 돼요. 사실 아이와 24시간 붙어있다 보면 예전에 구사했던 어휘의 반의 반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려고 독서나 여러가지 활동을 하면서 고군분투하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가까운 미래에 다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육아도 또 하나의 경력을 쌓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전 좋은 것 같아요. 지금 일을 쉬고 있는 게 아니라 엄마라는 역할을 새로 경험하고 경력을 쌓고 있다는 관점으로 바꾸는 거죠.
현재 자신의 환경과 조건에 대해 당당한 태도와 관점을 가지면 그게 결국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으로 돌아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들게 하거든요. 그러니 지금이 암울하고 힘든 시기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긍정적인 관점으로 현재를 해석해보려고 노력해요, 우리.
인터뷰 | 김미진 위커넥트 대표
여성과 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고 더 많은 프로페셔널 여성들이 리더가 되길 욕망합니다. 서로의 일과 삶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느슨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관심이 많고, 언젠가 풀코스 마라톤 완주를 꿈꾸는 러너입니다.